바스터즈: 수치스런 녀석들
 *스포일러 주의.

 난생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다. <킬 빌>을 정말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으나 내가 고등학생 때 개봉했기 때문에 보지 못했고, 그 이후로는 끌리는 게 없었다.(생각해 보니 딱히 이 감독 영화를 많이 본 것도 아니구나-_-;;) S씨랑 조조로 보러 갔는데, 정말 즐겁게 봤다.(2시간 반을 넘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19금 등급을 받은 만큼 잔인하기도 하고 감독 이름이 아깝지 않게 피도 많이 나오고, 사람을 몽둥이로 쳐죽이는 장면이나 이마에 하켄크로이츠를 새기는 장면, 죽은 사람 머릿가죽을 벗기는 장면 등에선 조금 '으으' 거리기도 했지만 이런 쪽으로는 상당히 비위가 강한 편이라 관람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누군가 "내 이거 아직 못 봤는데 같이 보러 갈래?"라고 하면 "봤는데 또 볼래!" 이러면서 흔쾌히 재탕할 듯. <펄프 픽션>이랑 비교를 많이 하던데, 이것도 조만간에 한번 봐야겠다.

 <킬 빌>을 볼 때도 느꼈는데, 이 아저씨는 아주 뻔뻔해서 마음에 든다. <킬 빌>에서 우마 서먼이 일본도를 들고 전세계를 누비면서 복수를 하는 와중에 비행기를 타고, 비행기 좌석에는 일본도를 걸 수 있게끔 설치된 고리(걸이?)가 있다. 그리고 이 영화 <바스터즈: 수치스런 녀석들>에서는 대담하게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히틀러를 죽여버린다. 그것도 신원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수많은 총알을 얼굴에 박아넣으면서. 이때까지 내가 본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어느 작품에서도 접하지 못한 과감한 역사 파괴를, 브래드 피트라는 거물을 고용한 영화에서 이 아저씨는 태연자약하게 실행한다. 브라이언 싱어가 실제 있었던 히틀러 암살 시도를 영화화하면서, '히틀러는 암살 당하지 않는다'라는 모두가 다 아는 결말로 인해 스릴러라는 장르에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갔던 것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쿠엔틴 타란티노는 도덕, 규율, 상식, 역사적 사실 등에 구애받지 않고 나치를 때려잡는 한무리의 남자들을 굉장히 보고 싶었나 보다.

 브래드 피트는 처음에는 콧수염만(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특징 중 하나) 눈에 들어왔는데, 이 무리가 나치를 때려잡는 상황을 처음 제대로 묘사하는 부분부터는 콧수염을 무시하고 다시 브래드 피트로 볼 수 있었다. 곧 죽일 포로(?)들을 앞에 두고 빵을 우적우적 먹으면서 엄청난 서부 사투리로 떠들어대는데, 이 아저씨 특유의 땡글땡글한 어딘가 소년 같은 눈동자가 확 눈에 들어왔달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취향은 아니고 그닥 섹시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만(내가 보기엔 안젤리나 졸리 쪽이 훨씬 섹시하다;;) 배우로서는 점점 발전해가고 있는 듯. 어쩌면 이 아저씨 작품 중 최고를 꼽으라면 (지금으로선) 이 영화를 고를 수도 있겠다. 다이앤 크루거는 여전히 예쁜데다(<트로이> 때부터 마음에 들어했음) 연기도 많이 늘었고, 처음 보는 멜라니 로랑(이름은 왜 익숙하지?;)도 마음에 들었다.

 대충 평을 보아하니 영화를 인용한 것이라든가 언어적 유희에 대해서도 극찬을 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내 수준은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전혀 모르겠다. 영화를 인용했다는 건 정말 단 하나도 짚이는 게 없고(...)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가 난무하는 작품에서 내가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영어 뿐이니 결국 건진 건 딱 한장면(알도 레인과 한스 란다의 빙고. 이건 정말 웃겼다!) 뿐이었다.-_ㅠ

 <킬 빌> 개봉 즈음에 읽었던 인터뷰에서 쿠엔틴 타란티노는 자신은 관객(대중이었나? 어쨌든;;)이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만든다고 했다. <킬 빌>을 보고 나서 이 인터뷰를 떠올리며 이 아저씨를 부러워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걸 만들면서 즐거워했을 쿠엔틴 타란티노의 모습이 대충 상상이 가서 거의 질투가 날 정도로 이 아저씨가 부러워진다.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찍으면서 평단과 관객의 호응을 끌어내는 영화광 감독이라니, 너무 부럽잖아.;ㅁ;

 *빌리가 발레를 못하게 막는 아버지에게 대들며 외치던 "You are a BASTERD!"가 제일 기억에 남는 예문;;이기 때문일까(난 빌리가 맞아죽지 않을까 걱정했음;;), 원제 'Ingrolious basterds'를 '거친 녀석들'이라고 번역한 한국 제목은 영 성에 안 찬다. '녀석' 따위의 귀여운 어감이 전혀 아니란 말이다.-ㅅ-
by 침엽수 | 2009/11/02 20:12 | 감상, 잡상 | 트랙백 | 덧글(4)
트랙백 주소 : http://conifer.egloos.com/tb/5112095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피스 at 2009/11/02 21:14
이 영화 진짜 재밌었어. 나는 보던 중에 엄마한테서 3번이나 전화가 와서-_- 전화기 안 끈 것을 죽어라 후회하면서 나가서 전화를 받았는데 억울해서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더라; 나도 또 보러 가고 싶다
Commented by 침엽수 at 2009/11/03 19:51
진짜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겠다.;ㅁ; 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왜 3번씩이나 전화를 하셨을까.;; 가까이 있으면 같이 재탕하러 가면 좋을텐데, 아쉽다.-_ㅠ
Commented by 샤린로즈 at 2009/11/03 00:50
재미는 있었으나... 뭔가 알수없는 내용이었다는 ... 잔인해요!
Commented by 침엽수 at 2009/11/03 19:52
역시 잔인함에서 점수가 깎이는군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나는 침엽수가 좋다.
by 침엽수
Calendar
카테고리
전체
동물
베르바라
감상, 잡상
사진, 그림
문답, 테스트
미분류
최근 등록된 덧글
아직은 잘 버티고 있습니..
by 침엽수 at 12/21
네, 제발 누가 좀 데려..
by 침엽수 at 12/21
애가 정에 완전 굶주렸네..
by 레티 at 12/20
노란 애는 성품이 좋아서..
by 형씨 at 12/19
24일에 3D로 재탕하기로..
by 침엽수 at 12/19
이글루 파인더
rss

skin by zodiac47